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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의 어려움


"I just can't..." by icedsoul photography .:teymur madjderey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의 어려움




사람을 한결같이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주변의 소문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인해 어떤 사람을 오해하여 인간관계가 꼬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해로 인해 부부가 이혼하고, 절친했던 친구가 오랫동안 등을 돌리며, 사업상 동반자에서 원수로 돌아서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사람의 신뢰성에 대해서 크고 작은 판단을 하고 나름대로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그 판단은 오차가 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의 창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마음의 창은 외부 상황에 따라 쉬이 흔들린다.



증자는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공자의 제자이다. 한번은 그와 이름이 같은 이가 사람을 죽였다. 증자를 아는 사람이 걱정하여 증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증삼(증자의 본명)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여전히 베를 짰다. 또 한 사람이 찾아가 고했다.
"증삼이 살인을 했습니다."
"우리 애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증자의 어머니는 계속하여 베를 짰다. 얼마 뒤 또 한사람이 달려와서 고했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마침내 증자의 어머니는 북을 내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달아났다. 증자가 어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어머니도 처음 두 사람까지는 믿지 않았지만, 세 사람이나 와서 같은 말을 하자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조차도 평소 덕행을 찬탄해 마지않았던 수제자 안회가 스승인 자신에게 올릴 밥에 먼저 손을 댄다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안회가 밥에 떨어진 재와 티를 걷어내다가 같이 딸려 나온 밥풀이 버리기 아까워 먹었던 것이다. 공자가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당시 공자는 자신의 실수를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눈이지만 그래도 믿을 수가 없고, 의지할 것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의지할 것이 못된다. 제자는 이것을 기록하라. 사람을 아는 일은 진실로 쉬운 것이 아니라고."




마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면 여러 가지 오류를 면하기 어렵다. 증자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아무리 황당한 거짓말이라도 반복적으로 들려온다면 마침내 마음은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각종 광고며 판촉에 현혹되어 돈을 쓰게 되고, 다양한 사기와 속임수에 넘어가 돈을 잃기도 한다.




또한 마음은 그 당시 상태에 따라서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우울할 때는 상대를 평소보다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이 높으며, 마음이 밝고 기쁠 때는 웬만하면 믿어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상대가 의심하느냐 혹은 믿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뢰성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상호간섭의 존재인 것이다. 즉 호감을 가지고 믿어준다면 상대의 믿음에 호응해서 변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춘추시대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가 담긴 고사성어로,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 사이를 뜻한다. 이 고사성어의 이면에는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깊은 믿음이 담겨 있다.




관중은 춘추 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포숙아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포숙아는 관중의 현명함을 알아주었고 깊은 믿음으로 대했다. 관중이 가난하게 살았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관중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하였으나, 포숙아는 관중을 한 번도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관중이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다.




한 번은 관중이 포숙아를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해서 포숙아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때 포숙아는 사람마다 운세가 있다며, 관중을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매번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아는 다만 관중이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 여겼다. 그리고 관중이 세 번 싸움터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그를 겁쟁이로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중이 모시던 공자 규가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관중과 함께 곁에서 규를 도왔던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관중은 붙잡혀 굴욕스런 몸이 되었다. 그때도 포숙아는 관중을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관중이 작은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여겼다. 나중에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인간관계에서 섣부른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부른다. 인간관계에서만은 마음이 내리는 결정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시간 속에서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어주면 믿어주는 만큼 더욱 믿음직해지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 : 권순석
발췌 : 앞서가는소수/IT,기획,전략,조직관리,역량,리더쉽,CMM,PM,CRM,CIO - 시삽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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